그 아이는, 아니, 그 ‘여성’은 중학교 1학년 남학생한테 너무나 다른 세상 속 존재처럼 느껴졌다.
다른 사람은 하나도 없는 어떤 높은 건물 옥상. 남학생 너머엔 마치 신기루라도 되는 듯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여성이 서있었다. 나이는 고등학생쯤 될까. 하지만 어쩐지, ‘여자애’보단 ‘여성’이 더 맞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여고생이라 한들, 저렇게 성숙한 느낌은 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여자애는 ‘지금’ 남학생보다 훨씬 키가 컸으며, 묘하게 보랏빛이 감도는 검은색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채 아래로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 느낌이 너무나 밤과 어울려서, 남학생은 순간 침을 꿀꺽 삼켰다. 어른스런 모습에 양갈래라는 그 묘한 느낌이, 여자애의 존재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하는 것만 같았다.
여자애는 몸에 달라붙는 긴팔 남색 셔츠, 그리고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감정을 알기 무척 어려운 표정으로, 남학생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틀림없이 무표정은 아니었지만, 그 표정은 남학생한테 여전히 알 수 없는 무언가였다. 몸에 달라붙는 옷이라서인지 불빛 너머로도 알아챌 수 있는 굴곡에까지 눈이 가자, 남학생은 얼른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남학생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여자애의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저 양갈래, 안 어울리는 거 같은데 묘하게 눈이 가네.
그런 생각을 하다, 남학생은 자기가 자꾸만 저 여자애를 빤히 쳐다보게 된단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그건 여자애가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란 까닭도 컸다. 남학생은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묘한 느낌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학생이 이럴 수밖에 없는 덴 다른 까닭도 있었다.
지금 남학생은, ‘저 여자애’ 때문에 ‘이런 모습’이 되고 만 것이다.
이야기는 조금 전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으함…”
남학생, 최형욱은 졸린 눈을 비벼가며 저녁노을이 비치는 놀이터 벤치에 혼자 앉아있었다. 벌써 가을이라서인지, 이런 시간인데도 해는 벌써 저 너머로 지려 하고 있었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 몇 명이 보이긴 했지만, 이제 추워져서 그런지 그리 많진 않았다.
그리고, 형욱은 집에 돌아갈 기운이 그다지 나지 않았다. 오늘은 어째서인지 마음이 자꾸 허전했던 것이다. 친구들과 실컷 떠들고 놀았는데도, 형욱은 그리 신나는 느낌이 아니었다.
왜 이렇게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걸까.
오늘도 다른 날과 그다지 다른 건 아니었다. 형욱은 열심히 수업을 한 귀로 넘겼고, 친구들과 복도나 놀이터에서 실컷 놀았으며, 서로 주먹을 주고받으며 하루를 보냈다. 좀 문제아처럼 보이긴 하지만, 다른 애들과 아주 크게 다르진 않을 터였다. 중학생이 되면서 몸집이 좀 커져서인지, 여자애들이 좀 피하는 느낌이긴 하지만 형욱한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여자애한테 큰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좀 아쉽긴 했지만.
여러 모로 더벅머리에 가까워진 머리카락을 박박 긁어가며, 형욱은 쏟아지는 잠을 내치려 애썼다. 하지만 그런 행동도 그저 헛수고일 뿐이었다. 아무리 손을 내저어도, 이 마음만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던 것이다. 그것도 이상하리만치.
“아, 진짜…”
불만을 드러내며 여전히 벤치에 앉아있는 형욱의 눈에, 그네에 타려 하는 동갑내기(처럼 보이는) 여자애들이 들어왔다. 교복을 입은 걸 보면 틀림없이 중학생이겠지만, 형욱은 그다지 그게 잘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저기에 있는 애들은 초등학생처럼 보였던 것이다.
어쨌든, 거기에 있는 여자애들 몇 명은 그네를 둘러싼 채 초등학생처럼 떠들며 놀고 있었다. 정말 교복을 입은 초등학생처럼 보일 정도였다. 고작 그네 하나 타는 게 뭐가 재밌는지, 그 애들 얼굴에선 이만큼도 지루하단 느낌이 들지 않았다. 벌써 중학생씩이나 되었는데도.
쟤들은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고 떠들지 않을까?
요즘들어 그런 애들이 있는지 없는지는 둘째치고, 형욱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형욱은 여자애들을 그리 잘 알지 못했지만, 그만큼 저 아이들은 자기보다 어리게 느껴졌던 것이다.
“근데 있잖아, 오늘따라 세상이 진짜 예뻐보인다. 그지?”
그 때, 갑자기 어떤 여자애가 그런 말을 꺼냈다. 그 초등학생처럼 보이는 여자애들 중에서도 가장 키가 작은, 아무리 봐도 교복이 무척 어울리지 않는 여자애였다.
“진짜 그러네. 솔이는 참 보는 눈이 좋다. 그지?”
“응. 나도 그래서 솔이가 만날 부럽던데.”
“에헤헤. 진짜?”
그 말에, 형욱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쩐지 그게 무척 웃겨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저 애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형욱한테는 그저 우스운 이야기일 뿐이었다.
“쟤들도 참 안됐다. 이제 중학생씩이나 됐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 형욱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대고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형욱한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생각한 걸 실제로 중얼거려봤을 뿐이었다.
문제는 그 때 일어났다.
갑자기 누가, 자기 팔을 휘감은 게 느껴진 것이다.
잠시 뒤, 형욱은 자기가 공중에 떠있단 사실을 ‘느꼈다’. 아니, 사실 형욱은 자기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신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이, 이게 뭐…?!”
그렇게 외쳐보지만, 형욱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느낌이 들었다. 뭔가 자기를 둘러싼 게 크게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게다가 지금, 자기 오른팔은 누군가한테 꽉 잡혀있었다. 지금 자기가 공중에 붕 떠있는 것도, 그 밖에 모든 것도 다 그 ‘누군가’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그것보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무서워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주위 풍경은 형욱이 소리도 지르지 못할 만큼 빨리 바뀌고 있었다. 공중에 떠있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이었단 말인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묘한 느낌이, 형욱의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그런 생각도 했지만, 형욱은 이내 그걸 빨리 포기하기로 했다.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애초에 지금 이 상황은 형욱한테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상식만으로 생각해봐도, 이게 불가능한 일이란 건 틀림없었다.
그 불가능한 일이, 지금 형욱의 눈앞에 펼쳐져있는 것이다.
결국 반쯤 포기한 채, 형욱은 그대로 멍하니 ‘누군가’한테 온몸을 맡겼다. 그러는 사이 움직임은 점점 느려지더니, 이윽고 형욱은 어딘가에 ‘내려앉았다’.
그렇게 느릿느릿하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형욱은 바로 이 곳, 옥상에 주저앉아있었던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리고 눈앞을 보니, 거기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애가 있었다. 고작 여자애일 뿐인데도, 함부로 다가가지 못할 것만 같은 수수께끼 인물이.
형욱은 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 여자애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을 뿐더러, 이 여자애가 너무나 묘한 존재였으니까.
사실 그 여자애(어쩌면 누나)가 연상처럼 보인다는 까닭도 있었지만, 형욱은 저 여자애한테 말을 거는 것 자체가 겁났다. 자기한테 ‘이런 짓’까지 했는데, 또 뭘 할지 짐작할 수 없어서였다. 이런 감정은 정말로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물론 형욱이 여자애를 잘 모르는 것도 있었지만.
하지만, 형욱은 여자애만큼이나 ‘지금’ 자기 모습도 무척 신경쓰였다.
아까부터 뭐라 말하면 좋을진 모르겠지만, 자기 모습이 틀림없이 ‘바뀌었다’는 것만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물론 거울로 본 건 아니었지만, 몸집이나 그 밖에 여러가지가 어쩐지 지금까지랑 달라진 느낌을 받은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 역시 저 여자애가 한 짓이 틀림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형욱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뒤로 더더욱 젖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교복이 걸리적대는 거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하자, 형욱은 자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자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여자애가 표정만큼이나 덤덤하기 이를데없는 말투로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너, 아까 그 여자애들을 보며 웃지 않았니?”
자기를 탓하는 건 아니었지만 무척 찔리는 말을 들으며, 형욱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 앞에서 거짓말은 할 수 없단 걸 깨달았던 것이다.
“탓하는 건 아냐. 화난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그 애는 내가 잘 아는 애고, 네가 그런 식으로 대하는 걸 그냥 넘어갈 순 없었어. 그런 취급받을 애는 아니거든.”
그 말에, 형욱은 정말로 두려워졌다. 화가 안 났다고는 해도, 자기 말에 심기가 거슬렸단 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자긴 어떻게 되는 걸까. 재수가 없단 건 틀림없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선 그런 생각조차 무섭게 느껴졌다.
게다가 벌써, 세상은 이렇게나 어두워져있었다.
가을은 해가 지는 것도 빨라서인지, 벌써 세상은 수많은 불빛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여기가 어떤 건물 옥상이란 건 알 수 있었지만, 몇 층인지는 형욱조차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주위가 어두웠고, 불빛들로 비춰진 데만 빼면 뭘 분간하는 것조차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가 퍽 높은 데란 건 알 수 있었다. 불빛들이 자기랑 좀 멀리 떨어져있어서였다.
정말 자기는 이러다가 어떻게 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무섭니?”
여자애가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묻는데도, 형욱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냥 얼른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이런 게 ‘현실’이란 것조차, 형욱은 믿고 싶지 않았다. 자기 몸이 자꾸만 떨리는 게 느껴졌지만, 자긴 고작 이렇게 고개를 숙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애들하고 웃고 떠들었는데, 왜 나만 이런 꼴을 당해야 하지.
“대, 대체 왜 저한테…”
그렇게 간신히 목소리를 내고 나서야, 형욱은 자기 목소리가 묘하게 높아졌단 걸 깨달았다. 중학교에 올라오기 전부터 자기 목소리가 낮아졌단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다시 돌아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말했잖아. 그냥 그것뿐이야. 너한테 ‘내가 있는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고.”
“그, 그게 무슨…?”
“당분간 나랑 같이 다니지 않을래? 물론 학교가 끝난 뒤에. 보여주고 싶은 데가 있거든.”
그런 말만 들어도 형욱은 다시 몸이 떨리는 걸 느꼈지만, 여기서 싫다고 하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는 뻔했다. 게다가 이렇게 쭈그려앉은 채 여자애를 보면, 어쩐지 훨씬 더 무섭게 느껴졌다. 자긴 애초에 뭘 고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왜. 싫어? 만약 그렇다면 네 모습을 원래대로 돌려놓지 않을 수 있는데.”
“…네?”
그 말에, 형욱은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꼈다. 이미 자기 목소리나 헐렁해진 교복으로 상황은 짐작했지만, 막상 그 말을 들으면 목이 턱 막혀오는 것만 같았다. 대체 이 여자애는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 걸까. 형욱은 그것조차 알 수 없었다.
여자애는 여전히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으로 형욱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그 대답을 꼭 듣고 싶다는 것처럼.
…저 사람한테 난 절대 이길 수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형욱은 다시금 마음이 조여오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형욱한텐 여자애가 자기한테 쓴 그 어떤 힘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이 여자애는 아무리 봐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자기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원래대로 돌려놓지 않으면, 자긴 살 수 있을 거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네.”
결국 형욱은 고개를 숙인 채,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자기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몇 번이고 하며.
앞으로 자기한텐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걸까.
그런 생각만 하면, 형욱은 어쩐지 마음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