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아침, 비상은 잠에서 깨어나 자기 방을 가만히 둘러봤다. 아침부터 찌는 날씨를 보니, 오늘은 참으로 한여름다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이렇게 더운 나날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생각하는 순간, 비상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새로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 ‘놀이’ 자체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비상이 모르는 사이, 그 길고 긴 순간들도 어느덧 지금 이 여름처럼 끝날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갑자기 꿈속에서 천사의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은 게 그저께인 것 같은데, 이렇게 보면 시간은 참 빠르다고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여기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아쉬워하는 이들도 몇 명은 있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비상은 핸드폰에 뭔가 연락이 들어와있다는 걸 깨달았다. 뒤늦게 확인해보니, 그건 의영의 메시지였다. 비상은 바로 전에 의영과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메시지 자체는 생각보다 짧았다.
-비상이 넌 모레 나간다고 생각해라.
이 말을 볼 때, 결국 의영이 말한 대로 일이 이뤄진 듯했다. 생각해보면 혜은과의 그 일 뒤로, 비상은 오랫동안 남과 ‘놀이’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물론 이걸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으므로, 비상은 언제 한 번 자기가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봐야겠다 마음먹었다.
비상이 그 생각에 빠져있을 때였다.
“어?”
갑자기 ‘다른 느낌’을 받고,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이건 뭐라고 하면 좋을까, 직감에 가까웠다. 딱히 까닭도 뭣도 없지만, 어쩐지 현의 얼굴을 보고싶었던 것이다. 비상은 남들이 보는 것보다 훨씬 깊이 생각하지 않고 움직일 때가 많았지만, 지금은 특히 갑작스러웠다.
시계를 보니, 벌써 시간은 정오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이렇게 햇살이 센 날은 지금이 아침인지 오후인지조차 알아채기 어려웠다. 비상은 잠시 생각하다, 천천히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모처럼 직감을 느꼈으니, 느낀 그대로 움직이고 싶어졌던 것이다. 물론 이 뒤에 있을 일은 전혀 짐작하지 않은 채로.
그렇게 현의 집 앞에 다다르자, 비상의 눈앞엔 전혀 생각지도 못한 풍경이 펼쳐져있었다.
“이건 뭐…?”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을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비상의 눈앞엔 승지 및 ‘다른 모습’인 현이 서로 감싸안고 있는 뜬금없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그냥 감싸안고 있었다면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저 둘은 친한 사이라 그냥 넘길 수 없을 만큼 ‘깊게’ 감싸안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사귄다고 해도 딱히 이상해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게 더 이상할지도 몰랐다.
아무튼 이렇게 단지 감싸안고 있는 것뿐인데도 뭐라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는 풍경을 앞에 두고, 비상은 어쩐지 세상이 점점 더 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기가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비상은 방금 그 광경을 보고 꽤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이런 걸로 몸이 줄어든다는 어이가 없어질 지경이었지만, 지금 비상은 정말로 ‘다른 모습’이 되어있었다.
“안녕.”
그러거나 말거나, 현은 승지를 떼어놓지 않은 채 비상을 돌아봤다. 물론 민망해하는 눈치는 이만큼도 없었다.
한편 승지는.
“우, 우아악!!”
승지는 정말로 깜짝 놀랐는지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현한테 고개를 묻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깜짝 놀라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냅다 떨어지는 게 아니라 도리어 고개를 묻는 건 비상도 짐작하지 못했지만.
“그런데 뭘 하고 있었니?”
“승지가 이렇게 해달라고 했거든.”
“그래?”
비상이 묻자, 현은 여전히 승지를 감싸안은 채 이렇게 대답했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승지한테서 눈길을 거둔 채, 비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 승지는 누군가한테 위로받고 싶었던 듯했다. 마침 현이 지금 적절하게 느껴지므로 이렇게 감싸안고 있는 걸까, 라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승지한테 현은 가장 든든하면서도 안전할 존재일 테니까.
비상이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였다.
“아, 맞다. 나 볼일있는데.”
자기 품에 안겨있던 승지를 가만히 떼어놓으며, 갑자기 현이 그런 말을 꺼냈다. 이 말엔 비상은 물론, 승지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특히 승지는 갑자기 이런 말을 들어서인지 무척 얼떨떨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은 채비를 끝마치고, 이런 말과 함께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분간 내 방에 있을 거지? 그럼 잠깐 나갔다올게.”
“자, 잠깐…”
승지가 그렇게 말하거나 말거나, 현은 그대로 문을 닫고 대문 밖으로 나섰다. 이렇게 해서 이 낯선 집엔 비상과 승지, 둘만 남게 되었다. 사실 웬만한 일로는 그다지 놀라지 않는 비상도, 지금 이 상황은 조금 파악하기 어려웠다. 승지는 여전히 충격에 빠졌는지,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물론,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비상과 승지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상 역시 서있기만 할 수는 없으므로 일단 바닥에 앉았지만, 이럴 때 어쩌면 좋을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사실, 지금 비상은 참으로 묘한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모습으로, 승지와 단둘이서, 자기 집도, 물론 승지의 집도 아닌 ‘현의 방’에서 나란히 앉아있기 떄문이었다. 아무리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비상이라 한들, 이런 일은 정말 생각지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현은 아무리 봐도 바로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따라서, 둘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비상은 이렇게 묘한 분위기 속에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이 곳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잠잠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이어질 때였다.
“저, 그.”
더듬대는 목소리로나마 승지가 비상한테 이런 말을 걸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게 두 명뿐이란 걸 생각하면, 누구한테 한 말인지는 안 봐도 뻔했다.
비상이 승지를 가만히 쳐다보자, 승지는 얼른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자기가 먼저 말을 걸었단 사실을 잘 아는지, 다시 천천히 비상 쪽을 돌아봤다.
“현이랑 자주 만…나?”
어떤 식으로 말을 걸지 조금 고민하는 듯하다가, 승지는 이런 말을 건넸다. 사실 승지가 비상 및 현의 관계를 깊게 알고있을 리는 없었다.
“그래.”
“좋겠다.”
그 뒤, 다시 말은 끊겼다. 승지는 혼자 뭔가 생각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 이윽고 다시 입을 뗐다.
“그 사람하고 자주 얘기하지?”
“그 사람?”
비상은 잠시 생각하다, 그게 의영을 뜻한다는 걸 깨달았다. 승지는 의영과 서먹한 사이였다. 그런 사이인 승지가 다른 사람과 얘기할 때 의영을 ‘오빠’라고 말할 리는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승지는 그걸 본 뒤 한참동안 입을 열지 않다가, 이윽고 이렇게 물어왔다.
“그, 어때. 안 무서워?”
“아니, 무섭다기보다…”
비상은 그렇게 말하다, 지금 승지가 자기를 빤히 쳐다보고 있단 걸 깨달았다. 지금껏 승지가 이렇게 자기 말을 열심히 들은 기억이 없었기에, 비상은 속으로 조금 놀랐다. 지금 자기가 하는 말이 그렇게 중요하리란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승지도 그걸 느꼈는지, 잠깐 놀라더니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곤 다른 데를 바라보다가,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 사람, 그러니까 그…오빠란 사람을 잘 모르겠어.”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듯 이렇게 말하는 승지를 보며, 비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자기가 뭘 말할 건 전혀 없었다. 비상은 그저 승지의 말을 들어주면 될 뿐이었다.
그런 비상한테 마음을 놓았는지, 승지는 다시 입을 뗐다.
“몇 년 전에 처음 만난,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한테 오빠라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승지가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비상은 벌써 시간이 오후 세 시를 막 넘길 즈음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다지 여기 오래 있었던 건 아니지만, 비상은 승지와 같이 있었던 시간이 퍽 길게 느껴졌다. 여기가 반지하 집이라서인지 햇살이 잘 들어오지 않아 시간을 느끼는 게 조금 어려웠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비상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승지는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난 어색해 죽겠는데, 아빠는 내 생각같은 건 아무 신경도 안 쓰더라. 그냥 오늘부터 가족이다, 이러고 땡이야. 솔직히 좀 심한 거 아냐? 나만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말을 들으며, 비상은 승지도 의영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비상이 볼 때, 승지는 의영의 속을 짐작하지 못할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게 다만 승지는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자기 일에 더 눈이 가는 것일 뿐이었다.
“나는 딱히 그 사람이 싫은 건 아닌데, 정말로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도무지 그 마음을 알 수 없는 거야. 이상하지? 그래도 가족이라고 한 집에서 몇 년을 같이 살았는데. 이번엔 그런 일도 있었는데. 그런데 진짜야. 전혀 짐작이 안 돼.”
그래서 비상은 승지의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이 8월 맑은 날 오후답지 않은 깊은 그늘이 지금은 무척 편하게 느껴졌다. 승지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으면 좋겠는데.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이런 말하면 미안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도 사실이니까…근데 정말, 나는 잘 모르겠어. 그냥 겉으로 볼 때 그 사람 엄청 약해보이잖아. 남한테 싫은소리 하나 못할 거 같고. 나한테도 엄청 조심스럽게 대하거든. 그게 싫단 건 아니지만 너무 어색해서…”
그렇게 말꼬리를 흐리며, 승지는 숨을 가다듬었다. 한꺼번에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숨이 가쁜 듯했다. 비상은 승지가 숨을 가다듬는 걸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남의 말을 들어주는 건 비상이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아무튼 그런 사람이잖아. 괜히 남한테 잘해주려 그러고. 그런데 잘해주는 건 좀 서툴고. 근데 가끔 엄청 딴 사람이 된단 말이야. 그, 봤지. 얼마 전이었던가, 어떤 남자한테 막 소리지른 거. 대충 그럴 때가 있었어. 물론 자주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 말과 함께, 승지는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그 때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사실 승지도 남, 특히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이성한테 이런 말을 털어놓는 건 어려울 터였다. 어쩌면 지금 비상이 이러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을지도 몰랐다.
“솔직히 그 때 무섭더라.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진짜 알 수가 없는 거야. 그렇게 내 앞에서도 조심하고 큰소리도 안 치는 사람인데, 왜 갑자기 저렇게 무서우리만치 화를 내는 거지? 그런 느낌이었어. 아주 사람이 바뀐 것만 같더라구. 평소엔 도무지 그런 게 안 떠오르는 사람인데…그런 모습을 본 다음엔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더라. 저 사람 진짜 모습은 그래서 뭐지? 난 저 사람하고 어떻게 지내면 되는 거지?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어. 웃긴 얘길지도 모르지만…”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나서, 비상은 속으로 의영이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승지의 말을 들어보면, 의영이든 승지이든, 서로를 어떻게 대하면 몰라 망설이는 건 서로 마찬가지였다. 그와 함께, 이 둘은 서로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도 똑같았다. 사실 서로를 모르니까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는 것이라 말할 수 있으므로, 그리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비상이 승지의 말을 들은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지금껏 비상이 들어온 건 의영 시점에서의 이야기였다. 이렇게 양쪽 모두의 말을 다 듣게된 건 오늘이 처음일 터였다.
그 뒤, 승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기 마음을 한꺼번에 털어놓은 탓에 조금 지친 듯했다. 물론 비상은 더 말을 부추기지 않았다. 그저 아까 그랬던 것처럼, 아무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승지는 이제 마음이 조금 편해졌는지, 아까보다 비상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와있었다. 비상은 승지의 말에 마음을 기울이느라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단 걸 깨달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비상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 식으로 비상이 이 조용한 시간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였다.
“응?”
자기 어깨가 살짝 무거워진 걸 느낀 비상은 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곤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깨달았다. 지금 비상의 어깨엔 승지가 머리를 기댄 채 곤히 잠들어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앉은키가 대략 비슷하므로 비상의 어깨에 고개가 쉽게 닿은 듯했다.
물론 비상은 승지를 억지로 깨울 생각이 이만큼도 없었으므로, 그대로 내버려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 비상은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도 참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잔잔한 곳에서, 그것도 바로 옆에서 곤히 잠든 승지의 숨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가만히 있으니, 비상은 절로 눈이 감기는 걸 느꼈다. 이래도 괜찮은가, 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감기는 눈꺼풀한테는 이길 수 없었다.
결국 비상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여전히 자기 한쪽 어깨에 실린 무게를 느끼면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비상은 저절로 눈이 뜨이는 걸 느꼈다.
여전히 시간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흘렀으리란 건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비상의 짐작으로는 한시간쯤은 틀림없이 흘러간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비상의 모습은 원래대로 돌아가있었다. 승지는 그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여전히 비상한테 머리를 기대고선 곤히 잠들어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면 승지가 정말로 깊게 잠들어있단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다른 누군가가 자는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또 오랜만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있을 때였다.
“기다렸어?”
갑자기 이런 말과 함께, 집을 비웠던 현이 다시 돌아왔다. 그 목소리를 듣자, 비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고 있었다. 아마 조용한 곳에 오래 있어서 소리에 민감해진 듯했다. 목소리로 볼 때, 현 역시 원래대로 돌아온 듯했다.
한편, 승지는 갑작스런 소리에 눈을 뜨곤, 이 역시 갑작스런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 그…”
“좀만 더 잤으면 오래 볼 수 있었는데. 아깝다.”
드물게도 현은 그런 말과 함께 고개를 살짝 저었다. 승지는 이제야 상황을 알았는지, 방금 일어난 사람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리고, 승지는 용수철이라도 되는 듯 벌떡 일어났다.
“그, 그럼 난 갈게. 아, 안녕히 계세요!”
그 말만 남긴 채, 승지는 마치 게눈감추듯 저멀리 사라져버렸다. 비상과 현은 방금 승지가 지나간 대문 쪽으로 하나같이 고개를 돌렸다. 현이 아까 전 나간 것만큼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무튼 비상 역시 너무 오래 있었단 생각에 나가려 하자, 이번엔 현이 이런 말을 건넸다.
“그럼 같이 나가자.”
“또 볼일이 있니?”
“응.”
대체 무슨 볼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좀 묘하긴 하지만, 같이 나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해서 둘은 또 나란히 길거리를 걷게 되었다.
너무나 당연히, 둘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물론 어색해서 그런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비상은 지금 이 순간이 무척 편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아마 현도 그럴 터였다. 비상은 이제 자기와 현이 그런 관계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비상은 억지로 뭔가 말하는 성격이 아니지만, 딱히 뭔가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적어도 이 아이와 같이있을 땐.
그렇게 둘이 길을 걷고있을 때였다.
“이야. 이거 비상이 아냐?”
대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비상 일행은 큰길에서 강산과 마주치고 말았다. 강산은 마침 잘 됐단 표정으로, 얼른 자기가 갖고있던 뭔가를 비상한테 내밀었다.
그건 다름아닌, 모 유명회사의 조금 비싼 초콜릿이었다.
“니들, 딴 말 말고 이거 좀 먹어라.”
“이건 또 뭐야?”
“뭐, 뭐야. 불만있냐?”
이 한여름에 대체 무슨 초콜릿이란 표정으로 비상이 자기를 쳐다보자, 강산은 당황했는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리 막나가는 이 형이라 한들, 지금 자기가 하는 짓이 우습단 걸 알고있는 듯했다.
결국 말문이 막혔는지, 강산은 스스로 무덤을 파고 말았다.
“너 착각하지 마라 인마. 이건 얘 혼자 떨이로 이만큼 남아있었으니까 사온 거지, 딱히 다른 까닭있는 거 아니다. 알았냐?!”
“형은 대체 누구한테 새침대는 거야?”
“뭐, 뭐라고?!”
비상이 어이가 없어져서 그렇게 되묻자, 강산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런 둘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현은, 대뜸 이런 말과 함께 강산의 초콜릿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내가 먹을게.”
“그, 그래?”
이미 포장까지 뜯기 시작한 현을 보며, 강산은 민망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었다. 잠시 가만히 있던 강산은, 이제야 정신이 좀 들었는지 대뜸 비상한테 이런 말을 내던졌다.
“이걸 보라고 윤비상 이 놈아. 너보다 훨씬 어린 현이도 남을 이렇게 생각해주는데…”
“형이 아니라 초콜릿을 생각한 거 아냐?”
둘이 이런 말을 주고받거나 말거나, 현은 무척 눈을 반짝이며 초콜릿을 입에 담고 있었다. 마치 둘이 나누는 이야기엔 아무 관심도 없는 듯한 모습으로.
아무튼 이렇게 되었으므로, 비상은 오늘 있었던 일을 가볍게 입에 담았다. 비상의 말을 다 듣자, 강산은 이런 말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기도 사정이 꼬였더라. 나 참.”
그걸 볼 때, 강산 역시 의영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듯했다. ‘뭐, 남의 사정에 끼어드는 것도 그렇지만…’이라 말꼬리를 흐리는 강산을 보면서, 비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까 승지가 했던 말을 비상은 아직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상이 느낀 걸로 보면, 저 둘 다 서로와 아주 벽을 쌓고싶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저 둘은, 조금씩이나마 천천히 다가가려 하고 있었다. 의영은 물론, 승지 역시 그랬다. 물론 둘이 가까워지려면 좀 더 뭔가 다른 게 있어야 하겠지만.
비상이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도, 현은 강산이 사온 초콜릿을 무척 맛있게 먹고 있었다. 마치 다람쥐라도 되는 듯한 그 모습을 비상이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강산이 이렇게 으스댔다.
“오늘은 현이 보고 참는다. 내가.”
“아, 그러셔?”
비상이 그렇게 대꾸하자, 강산은 순간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거둔 듯, 이런 말과 함께 비상 일행한테서 등을 돌렸다.
“내일 의영이 형 경기 볼 거지? 안 보기만 해봐라. 나 간다.”
“저 사람은 내가 안 볼 거라 생각하는 건가…”
물론 어이가 없어진 비상은, 강산의 등을 보며 그렇게 중얼대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현은 그러거나 말거나 ‘이거 맛있다’라는 말과 함께 강산이 준 초콜릿 한판을 다 먹어치우곤 무척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현과 헤어진 뒤, 비상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저건 뭐지?
자기 집, 즉 빌라 앞에 서있는 누군가를 보며, 비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세히 보니, 그건 비상이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아니, 잘 알고 뭐고를 떠나서, 비상은 이 사람을 바로 얼마 전에 본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빌라 앞에 쭈그려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혜은이었다.
혜은은 비상이 가까이 온 줄도 모른 채, 고개를 숙인 채 뭔가 겁내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지. 잠시 생각하다, 비상은 좀 더 가까이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혜은도 이제 누가 있는지 알아챈 듯 고개를 들다가, 다리가 풀렸는지 그대로 그 자리에서 굴러넘어지고 말았다.
“죄, 죄, 죄송…우아아악!!”
아마 오랫동안 쭈그려앉은 탓에 다리에 쥐가 난 듯했다. 지금이 밤이라서 어두운 것 및, 혜은이 바지를 입고있었단 건 천만다행일지도 몰랐다.
“가, 갑자기 와서 죄송해요.”
그런 말과 함께 혜은이 어떻게든 일어난 뒤, 둘은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상도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혜은은 여전히 민망했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비상도 섣불리 뭔가 말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때를 기다리는 게 더 낫겠다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흘러가려 할 때, 갑자기 혜은이 고개를 숙인 채 이런 말을 쏟아냈다.
“저 때문에 괜히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 신경쓰이고 그러시죠. 그, 제가 비상 씨하고 같은 무기를 쓰고, 멋대로 뭐 선물하려 하고, 저번엔 또…”
그 말로 볼 때, 아마 혜은은 비상의 짐작보다 훨씬 전부터 그렇게 생각한 듯했다. 처음부터 뭘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만약 비상이 뭘 말한다 해도 지금은 전혀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비상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혜은은 말을 이어갔다. 이번엔 조금 고개를 들고 있었다.
“갑자기 이런 말 들으니까 당황하셨죠. 그런데 그, 전부터 이건 말하고 싶어서…말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멋대로 온 주제에 이런 말까지 해서 죄송해요.”
거기까지 말을 끝마친 뒤, 혜은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비상은 아무 말도 없이, 다만 거기에 가만히 있었다. 지금 비상이 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일이라 생각해서였다. 혜은도 섣불리 비상이 뭔가 말하는 걸 바라진 않을 터였다.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북받쳐서인지, 혜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다시 한 번, 둘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다른 이들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비상도 혜은도 딱히 서로한테 말을 부추기진 않았다.
잠시 뒤, 혜은을 보낸 비상은 옥상에 올라와있었다. 물론 다른 건물이 아니라, 비상이 사는 이 빌라의 옥상이었다. 원래 올라올 수 있는지 어떤지는 둘째치고, 지금은 물론 아무런 문제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사실 비상이 이 옥상에 올라오는 건 여기 살게 된 뒤 처음이었다. 비상 자신도 그다지 올라올 생각이 안 들었던 것이다. 다른 먼 데에 있는 건물 옥상은 그렇게 자주 다녔는데, 여길 떠올리지 못한 걸 보면 등잔밑이 어두운 듯했다.
비상은 옥상에 다다른 뒤에야, 지금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밖에 나왔을 때 하늘이 수상쩍었다고 비상은 속으로 생각했다. 전에 본 예보로 생각해볼 때, 이번 빗줄기는 조금 굵을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 한들, 비상이 연습하는 데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어차피 ‘하늘’이 그렇게 해줄 테니까.
비상은 계단을 올라오며, 옥상에서 할 일을 이미 생각해놓았다. 물론, 그건 다름아닌 연습이었다. 여기서 보는 경치도 궁금했지만, 그것보다 지금 비상한테는 마음껏 연습할 시간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연습할 생각이 어쩐지 들지 않아, 비상은 가만히 난간에 몸을 기댔다. 딱히 우산은 없었지만, 이 역시 하늘이 어떻게 해주리란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비상은 신경쓰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이렇게 하고 있으면 주위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주위를 보면, 자기가 아직도 모르는 게 많았구나란 생각이 저절로 드는 것만 같았다. 여기저기 불빛이 눈에 띄었지만, 어쩐지 비상한테는 그 모든 것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물론 까닭은 알 수 없었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저 불빛들도 모두 여기서 수없이 떨어져있구나. 지금 머리위에 있는 별들처럼.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며, 비상은 후두둑 떨어지는 빗줄기를 가만히 맞았다. 이제 빗줄기는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듯 힘차게 아래로 쏟아부어지고 있었다. 연습은 비가 좀 그친 다음에 할까. 요즘 무기를 써본 적이 그다지 없어서, 비상은 이 뒤로 무기나 자기의 움직임을 조금 가다듬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비상은 이렇게 죽 있고 싶었다. 여전히 빗줄기는 시끄러울 정도로 거칠게 내리고 있었다. 그 빗방울이 주위의 소리를 모조리 가리면서 먼 곳에 있는 불빛조차 번지게 하는 걸 보며, 비상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참으로, 지금 이 세상에서 단 하나, 이 빗줄기만이 살아있는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