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소녀_붉은 밤의 시작

이제 계절도 여름으로 접어든 6월 첫날.
항상 그렇듯 자기 집으로 모여든 친구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던 미아는, 갑자기 울리는 예고도 없는 벨소리에 깜짝 놀랐다.
“미아야. 오늘 누구 와?”
“아니, 그건 아닐 텐데…”
겁먹은 목소리로 백설이 말을 걸어오자, 미아는 짚이는 게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미아네 집에 자주 들르는 사람이라면 벨 대신 비밀번호를 바로 누르고 들어올 터였다. 거꾸로, 모르는 사람이라면 오기 전에 연락은 줄 게 틀림없었다.
혹시 나쁜 사람이면 어떡하지.
지금 미아라면 ‘다른 모습’이니만큼 어떻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겁이 많은 미아 입장에서는 그런 가능성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미아가 머뭇대고 있을 때, 이번엔 인터폰에서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여기 그 집이죠? 그, 백홍준이란 사람…”
“아, 네. 마, 맞는데요?!”
그 낯선 사람이 갑자기 자기 ‘다른 모습’ 이름을 대는 바람에, 미아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이런 휴일에 저 사람은 무슨 일로 미아를 찾은 걸까? 설마 나쁜 일인 건 아닐까?
하지만 인터폰에서 들려온 다음 이야기는, 미아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고 말았다.
“저, 하늘한테서 ‘다른 모습’이 된 사람인데요. 얘기 좀 나누고 싶어서…”
“…네?”

잠시 뒤.
“아, 안녕하세요. 갑자기 와서 죄송해요.”
그런 말과 함께, 문제의 그 낯선 남자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나잇대는 대충 ‘지금’ 미아와 비슷하다 할 수 있을까. 굳이 말하자면 지금 미아보다도 체격이 조금 더 좋아보이게 느껴졌다.
“…저 사람 누구야?”
그렇게 미아네 집으로 들어온 낯선 남자를 보고, 미아 등뒤에 숨은 백설은 수상쩍단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원래 낯을 잘 가리는 성격인 설이가, 말 그대로 처음 본 사람한테 고운 눈빛을 보낼 리 없었다.
“아, 다른 친구들도 있구나. 나 수상한 사람 아닌데.”
“안 수상한 사람이 그런 말 하는 거 본 적 없는데.”
“봄이야. 이럴 땐 좀 가만히…”
미아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눈앞에 있는 낯선 남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여기까지 온 걸까?

“그, 그래서 어쩐 일로…”
그런 생각에 더듬거리며 미아가 말을 걸자, 눈앞의 낯선 남자는 ‘그러고 보니 깜박했네’란 표정을 지었다.
“사무소에서 들었는데, 부모님 때문에 ‘다른 모습’이 됐단 게 정말이에요?”
“아, 네. 네…”
어째서였을까. 미아는 자기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지금까지 미아는,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데 복잡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지금 자신을 ‘다른 모습’이라 알고 있는 지금, 미아는 그 때와는 또 다른 민망함을 느꼈다.
…설마 ‘이미아’라는 진짜 모습까지 직접 보고 온 건 아니겠지?
그 생각만 하면, 미아는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두근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 그렇구나.”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생각보다 훨씬 아무렇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이래도 되나?
남자와 마주한 건 겨우 몇 분밖에 안 되는데, 미아는 벌써부터 그런 생각이 머리를 맴도는 걸 느꼈다.
“아, 죄송해요. 자기소개를 안 했다. 저는 이현이라고 하는데…일단 들어가도 돼요?”
“아, 네. 드, 들어오세요.”
그러고보니 눈앞에 있는 이 손님과 미아는, 지금껏 죽 현관에서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런 걸 깜박한 게 민망해진다는 생각을 하며, 미아는 그 현이라는 손님을 집안으로 맞아들였다.

“저, 그래서 절 만나려고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현이 거실 바닥에 자리잡자, 미아는 조심스럽게 그런 말을 꺼냈다. 설이를 비롯한 다른 아이들도, 미아 옆에 옹기종기 앉아서 낯선 사람인 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네. 원래는 중학교 1학년쯤이란 말을 듣고 왔는데, 맞아요?”
“아, 네.”
이런 ‘다른 모습’으로 원래 나이를 말하는 게 묘한 느낌이어서, 미아는 그런 식으로 엉거주춤 대답했다. 애초에 바로 옆에 앉아있는 친구들이 중학교 1학년생들이니, 속여보려고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 난 원래 고등학교 2학년인데. 말 놔도 돼?”
“이미 놓고 계시는데요.”
갑자기 말을 편하게 하기 시작한 상대방한테 반쯤 당황하며, 미아는 조심스레 그렇게 대답했다. 미아가 자꾸만 긴장한 모습을 보여서인지, 바로 옆에서 오른팔을 부여잡고 있는 설이는 ‘너무 떨지 마’라고 나직히 속삭였다.
“그런가? 그럼 이대로 말할게. 원래 중학교 1학년쯤이구나.”
“…네.”
자기도 모르게 미아는 눈길을 현한테서 돌리고 말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미아의 짐작일 뿐이었지만, 저 현이라는 사람이 ‘다른 모습’이라는 건, 즉 미아와 무척 가까운 상황이란 말이 틀림없었다.

대체 자기는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미아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골똘히 하고있을 때였다.
“그래서, 내가 왜 이렇게 됐냐고 하면…”
“아, 맞다!”
아무렇지 않게 다음 얘기를 시작하는 현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미아는 이 현이라는 사람이 자기처럼 ‘다른 모습’이 된 까닭을 아직 못 들었단 걸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가장 중요한 이야기였는데도, 지금까지 미아는 딴 생각을 하느라 물을 생각을 못 했던 것이다.
“그, 그러고 보니 왜…”
“음. 혹시 홍…미아는 ‘놀이’란 게 뭔지 알아?”
“…’놀이’요?”
언뜻 듣기엔 흔한 낱말이었지만, 현의 뉘앙스는 어쩐지 지금까지 듣던 것과 달랐다. 즉, 미아가 오래 전부터 알고있던 ‘놀이’라는 낱말과는 뭔가 다른 뜻을 지닌 게 틀림없었다.
“무슨 다른 뜻이 있는 거예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응. 나도 잘 몰라.”
“네?”
“내가 그 ‘놀이’에 핸디캡이라는 게 걸려서 이렇게 됐거든.”
“…놀이인데 핸드캡이요?”
가면 갈수록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미아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말을 꺼낸 현 자신도, 뭔가 잘 모르겠다는 묘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너희들도 이런 ‘놀이’가 있단 말은 안 들어봤지?”
거기까지 말하다가, 현은 잠시 말을 끊고 주위에 있는 미아의 친구들을 돌아봤다. 다들 그 말을 듣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무소 어른들도 그런 말은 한마디도 안 했는데. 그지?”
“어. 나도 처음 들었어.”
시간이와 설이가 나란히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미아는 가면 갈수록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차는 걸 느꼈다. 어쩐지 자기 모습이 이렇게 바뀐 것보다, 지금 현한테 들은 ‘놀이’가 더 현실과 동떨어진 것만 같았다.
“나도 너희들 나이쯤부터 ‘다른 세상’을 알고 자랐는데, 이번 ‘놀이’는 정말로 처음 들었거든. 이상하지?”
“네. 그럼 지금까지 없었단 말이잖아요.”
현의 말에, 미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 집단-다른 아이들-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는 미아가 볼 땐 보통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음…”
그런 말과 함께, 현은 가만히 눈을 감고 팔짱을 끼었다. 아마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지만, 신기하게도 미아 눈에는 반쯤 무표정에 가깝게 보였다.
이 현이라는 사람…언니는 대체 무슨 사람일까.
‘다른 아이들’과 알고지낸 지 1년 남짓밖에 안 된 미아는, 이 갑작스러운 만남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몰라 속으로 끙끙 앓았다.

현이 떠난 뒤에도, 미아는 잠시동안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미아는, 자기와 같은 처지인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진짜로 나타나고 보니, 미아의 마음은 무척이나 복잡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