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3월 중순으로 접어들 무렵.
어두컴컴한 도시의 어느 골목길에서, 갑자기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퍼졌다.
“이 길이 맞나? 아니면…”
거기엔 목소리의 주인공인 어떤 덩치큰 남자 한 명이, 어울리지도 않는 고등학생용 가방을 걸쳐맨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밤길을 걷고 있었다. 마치 ‘도시’란 걸 태어나서 처음 본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저런 덩치라면 뭐가 무서운 게 있냐고 누군가 핀잔을 줄지도 모르지만, 남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겉모습만 보면 스무 살쯤 된 청년인 것처럼 보였지만, 남자가 입고 있는 교복은 틀림없이 이 근처 고등학교 거였다. 아마 이런 모습에 묘하게 무뚝뚝하면서 거친 이목구비가 주위 사람들의 눈길을 퍽 잡아끌었겠지만, 지금 남자한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아마 날이 어둡기에, 그걸 신경써야 할 까닭이 없어져서일지도 몰랐다.
지금 남자는, 이 낯선 도시에서 이 길이 맞는지 모르겠단 생각에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 즉 김맹호는 이제 막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온 참인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직업’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실제 맹호는 고등학교 1학년만큼만 살아온 것도 아니고, 애초에 사람도 아니었다.
아마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맹호는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산속에서 몰래 살아온, ‘보통이 아닌 호랑이’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고까지 일컬어지는 야생호랑이였지만, 사람으로 둔갑해 사람 세상에서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요즘에 들어서 그렇게 되긴 했지만.
맹호는 원래, 아버지를 잃은 뒤 다른 이한테 보이지 않게 해서 산속을 혼자 떠돌고 있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였다. 다행히도 맹호는 호랑이 중에서도 ‘영물’이라 일컬어지는 ‘호랑이의 왕’이라서, 기척을 감추는 것처럼 보통 이들이 생각지도 못할 신비한 힘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것 역시 그러한 까닭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대보면 부끄러운 수준이라고 맹호는 생각했지만.
맹호 역시 자기가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단 건 알고 있었지만, 전국의 산을 떠돌아다녀야하는 상황 때문에 시험해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맹호는 나고 자란 강원도 산골에 다시 돌아온 걸 계기로 오랜만에 사람으로 둔갑했다가 근처에 살던 중학생 여자애, 솔이한테 정체를 들키고 말았다. 맨 처음엔 당연히 서로 놀란 둘이었지만, 이 일을 계기로 맹호는 비록 산골이었지만 사람세상에서 사람 모습으로 지내게 되었고, 솔이와도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가까워지게 됐다. 게다가 자기처럼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는 까치와 만나게 되어, 전엔 생각지도 못할 만큼 ‘매일매일 가슴 두근대는’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맹호가 얼마나 행복했는지는 말로 다 나타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솔이와 같이 중학교 시절을 보낸 맹호는, 갑자기 아주 어릴 적부터 죽 스승으로 삼던(그리고 지금은 시골에서 몰래 선생님을 하는) 누구나 아는 그 분, 환웅한테 이런 말을 듣게 된다.
-큰 세상에 나가 경험을 쌓아라, 는 말을.
맹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환웅과 죽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 땐 ‘아버지의 친구’라는 말만 들었지만, 맹호는 그 때도 그 젊은 남자한테서 ‘뭔가 알 수 없는’ 기운을 느꼈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 땐 사람을 만날 일이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맹호는 이 사람이 결코 보통내기가 아니란 걸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이 이 나라를 처음 만든 이란 걸 아버지한테 들은 건 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침울해하던 맹호는, 환웅의 가르침을 받고 서서히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다. 사람으로 둔갑한 뒤 산골 근처에서 역사선생님을 하고 있단 사실을 안 뒤에도, 맹호는 자주 환웅을 만나러 나갔다. 물론 환웅은 무척 친절한 성격이진 않았지만, 어쨌든 맹호를 항상 믿어줬고, 자기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곤 했다.
그 환웅한테서, 맹호는 그런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거부할 권리는, 그 당시 맹호한테 없었다.
처음엔 맹호도 몇 번이고 망설였지만, 환웅은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세상과 부대껴 지내야만 한다면, 지금 가는 게 가장 나을 거라는 말이었다. 물론 환웅한테는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특별한 힘이 있으니, 가서 지내는 데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가 되는 건, 산골에서도 아직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맹호가 도시에서 얼마나 헤맬지였다.
결국 맹호는 환웅의 기세에 밀려, 그 말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앞으로 자기가 얼마나 고생할지 눈앞이 훤한데도.
하지만 다행히도, 맹호는 혼자 여기에 온 건 아니었다. 한 해 동안 같이 지내던 친한 친구 솔이 역시, ‘어떤 사정’ 때문에 맹호와 같이 도시로 오게 된 것이다. 그 밖에 같은 처지로서 친하게 지내던 ‘까치’ 역시, 다른 모습이긴 하지만 맹호 일행과 같이 도시로 오게 됐다. 비록 맹호나 솔이처럼 같이 사는 건 아니지만.
처음으로 ‘혼자’ 아는 이들과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맹호는 알게 모르게 혼자 불안한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솔이가 ‘나도 갈 거다’라며 웃어보이자, 맹호는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솔이와는 마음을 터놓을 만큼 친하기에, 부담이 전보다 살짝 줄어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맹호는 그와 함께 솔이가 걱정돼서 견딜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르는 사실이었지만(산골에서도), 솔이한테는 남한테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었다. 그 사정 때문에, 맹호는 솔이가 낯선 곳에서 잘 해낼 수 있을지 자꾸만 신경쓰였다. 게다가 솔이가 전에 살던 ‘도시’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래도 솔이는 ‘나도 가고 싶어’라고 맹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솔이의 마음이 또렷하다면, 아무리 친한 친구인 맹호라 한들 그걸 막을 순 없었다.
그래서, 둘은 이 낯선 도시에서 같이 지내게 된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조차 짐작하지 못한 채.
“우리 맹호, 걱정 많이 하고 있나.”
도시로 전학와서 처음 등교하던 날, 솔이는 집에 나오기 전 웃으면서 맹호의 손을 잡았다. 솔이는 항상 맹호보다 맹호 마음을 더 잘 알아줬다. 정작 맹호는 솔이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할 때가 많은데.
“아, 아냐. 그런 거 안 해. 정말로.”
“에이. 우리 맹호 거짓말한다. 다 아는데.”
그렇게 말하는 솔이의 목소리가 너무나 다정해서, 맹호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 앞에서 거짓말을 할 용기가, 지금 맹호한텐 없었던 것이다.
“괜찮아. 분명 잘 될 거다. 우리 맹호잖아. 그지?”
맹호는 그 말에 뭐라 말도 못한 채 그저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솔이는 항상 누구보다 맹호를 깊게 믿어주곤 했다. 정작 맹호는 자기를 못미덥게 여기고 있는데도.
하지만 맹호는, 솔이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순수한 눈빛으로 자기 눈을 쳐다보고 있는 솔이를 보면, 도무지 고개를 저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다. 맹호 역시 누구보다 솔이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언제쯤 되면 솔이한테 당당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하면, 맹호는 마음속으로 한숨이 나오곤 했다. 자기가 그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그다지 들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지금 솔이는 집에서 혼자 맹호를 걱정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지리를 알아놓으려고 학교가 끝난 뒤 혼자 주위를 걸어다니느라, 맹호는 미처 솔이한테 연락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쯤 솔이는 엄청 기다리고 있을 텐데.
발걸음을 서두르면서도, 맹호는 그 생각에 괜히 미안해졌다. 도시를 ‘자기 눈으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기에, 여기저기 둘러보다 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던 것이다. 일단 빨리 걷고는 있었지만, 처음 오는 곳이다 보니 모든 게 낯설어서 자기가 제대로 걷고 있는지조차 알쏭달쏭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어두운 밤이라서 아무도 자기 모습에 깊은 관심을 안 보이고 있단 거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맹호는 산골에서도 무척 눈에 띄는 존재였다. 일단 이런 모습에 교복을 입고 있단 사실만으로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호랑이라는 특성상, 아무리 그 ‘위치’에 걸맞는 나잇대로 둔갑한다 한들 티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인상 역시 강한 데다가 몸집도 커서, 맹호는 눈길을 끌 수밖에 없는 나날을 보내왔다. 물론 평소엔 온순한 모습을 자주 보이기 때문에 오해를 산 적은 그다지 없지만, 그래도 거리를 걸을 때마다 다른 이들의 눈길이 모이는 건 맹호한테 큰 부담이었다. 게다가 사람세상에서 자기가 못미더운 존재라 여기고 있는 맹호의 성격이 더더욱 그 눈길을 힘들게 만들었다.
자기처럼 ‘사람과 다른’ 존재가 이런 도시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맹호는 비록 이렇게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속을 보면 사람과 아주 딴판인 존재였다. 이 어두운 밤에도 주위가 또렷하게 보이는 건 더할나위없이 큰 증거였다. 고양이들은 이런 맹호의 기운을 알아보는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꼬리를 빳빳하게 세우며 멀어져갔다. 물론 자기가 고양이와 친하게 지낼 수 있다는 생각은 그다지 해보지 않았지만, 그래도 맹호는 그 때마다 묘한 느낌이 들곤 했다.
그렇기에, 그리고 자기를 못미덥게 여기는 성격 탓에, 맹호는 자기 마음을 잘 못 드러내곤 했다. 덕택에 무뚝뚝하면서 무섭다는 말도 듣긴 했지만, 그래도 맹호는 감정을 드러내는 게 여전히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감추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 당황할 때나 기쁠 땐 자기도 모르게 감정이 드러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맹호는 민망해져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까닭도 있어서, 맹호는 될 수 있는 대로 눈에 안 띄게, 얌전하게 지내려 애썼다. 어차피 이렇게 해도 자기는 무척 눈에 띄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눈에 띌 때마다 민망한데, 여기서 더 민망해질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평소엔 온순한 성격이다 보니, 산골에서도 시간이 지난 뒤엔 맹호를 그렇게까지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곳은 낯선 도시였다. 맹호는 처음부터 다시 ‘그런 순간’과 맞닥뜨려야 하는 것이다.
자기가 정말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하면 마음이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맹호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환웅도 자기를 믿고 있는 것이다. 은사인 환웅은 물론 자기를 믿고 솔이를 맡긴 솔이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맹호는 여기서 못난 꼴을 보여드릴 수 없었다.
그 때였다.
“그러니까 너네 오빠는 어디 있냐고. 응?”
“그, 그러니까, 저는 잘…”
갑자기 골목길 구석에서 들린 목소리에, 맹호는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걸 느꼈다. 누군가 여자애를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목소리로 볼 때, 상대는 여자애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듯했다.
“이게 왜 이래. 그나마 피로 이어진 사이 아닌가? 그럼 연락은 갔을 거 아냐.”
“모, 몰라요. 오빠는 요즘 연락도 하나 안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유. 이젠 자기 일 아니라고 잡아떼시겠다?”
맹호는 이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쩌면 좋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물론 저 둘은 맹호와 생판 남이니, 그냥 지나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차피 맹호는 저 둘의 사정도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일만 커지기 전에 그냥 넘어가는 게 더 나았다.
하지만, 맹호는 그 자리에서 잠시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돌아가신 아버지가 이런 광경을 보면 뭐라 하셨을까, 란 생각에서였다.
-정말 이대로 좋을까.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도, 남자와 여자애의 목소리는 이어지고 있었다. 그 말 하나하나가 들려올 때마다, 맹호는 자기 가슴이 점점 더 크게 뛰는 걸 느꼈다.
“자꾸 이렇게 나오면 어쩔 수 없지.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거야. 알았어?”
“무, 무, 무슨 소린지 저는 잘…”
맹호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곳으로 살며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둠 너머에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마치 대낮이라도 되는 것처럼 ‘똑똑히’ 눈여겨봤다.
맹호만큼이나 훤칠한 키를 지닌 남자가, 언뜻 보기에도 내성적으로 보이는 단발머리 여자애한테 몸을 들이대고 있었다. 그것도 여자애 바로 옆에 손을 당당히 갖다댄 채.
이걸 보자, 맹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물론 맹호는 다른 이의 눈에 띄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생명’으로서 비겁하게 살고 싶진 않았다. 지금은 하늘에 있는 아버지나 환웅 역시 자기가 비겁하게 구는 걸 반기진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맹호는 용기를 낼 수밖에 없었다.
뒤에 가서 후회하는 것보단, 틀림없이 지금이 훨씬 나을 테니까.
“저기, 말이 좀 심하신 거 같은데…”
“어유. 댁은 누구신가?”
맹호가 조심스레 말을 걸자마자, 남자는 우습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런 짓을 하다가 걸렸는데도 전혀 무섭지 않은지, 맹호의 눈을 똑똑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건 좀 실례 아닌가? 게다가 말투도 좀…”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맹호는 이쯤되자 자기가 밀리는 느낌을 받았지만, 눈앞에서 벌벌 떠는 여자애를 위해서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이쯤되면 오기라도 부려야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맹호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짓을 하면서 이렇게 당당해도 되나 모르겠네. 아무리 그렇게 나와봤자…”
“아, 거 참 걸리적거리네. 사람도 아닌 주제에. 응?”
…뭐라고?
맹호는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새하얘지는 걸 느꼈다. 지금껏 자기가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챈 이는 단 한 명, 환웅밖에 없었다. 그나마 환웅 역시 어릴 때부터 원래 모습이었던 맹호를 봐왔기에, 이런 자기를 알아본다 한들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처음 만난 남자는 곧바로 맹호의 정체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마치 있을 수 없는 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맹호는 입을 딱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게 바로 정곡을 찔린다는 느낌일까.
하지만 남자는, 이런 맹호와 달리 너무나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뭔가 숨겨놓은 거라도 있나. 맹호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그럼, 이건 어떨까?”
남자의 말에, 맹호는 심장이 덜컥 멎는 걸 느꼈다.
뭔가 커다란 ‘변화’가, 맹호의 몸속에서 일어나고 있단 걸 알아채서였다.
맹호가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 지금까지 자기는 정신을 잃었던 걸까. 묘하게 멍한 느낌으로, 맹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남자는 어디로 간 거지?
일단 두리번거려봤지만,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남자뿐만이 아니라, 여자애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어리둥절해하면서 주위를 살펴보던 맹호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건 평소 때 맹호라면 절대 생각하지 않았을, ‘어둠에 관한 위화감’이었다.
눈앞이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원래 밤중에도 낮처럼 주위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맹호한테, ‘아무 것도 안 보인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가로등이 있었지만, 맹호는 이런 가로등이 없어도 어둠 너머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불빛만으로도 주위를 분간하는 게 어려웠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건 한둘이 아니었다.
맹호는 어쩐지, 가로등이 방금 전보다 훨씬 커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저 가로등이 그동안 확 자랐을 리는 없었다. 아무리 사람문물에 어두운 맹호라 한들, 가로등이 스스로 자라지는 못한단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구 크기가 바뀌었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서, 설마…”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대던 맹호는, 순간 가슴이 덜컹대는 걸 느꼈다. 자기가 낸 사람목소리에 아주 또렷한 위화감이 들었던 것이다. 아까 키 문제까지 생각하면,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 이제 너무나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맹호는 그걸 받아들이는 게 무서웠다. 도무지 그런 사실을 믿을 수도 없을뿐더러, 믿고 싶지도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모를까, 맹호는 신기한 힘을 지닌 호랑이였던 것이다. ‘호랑이의 왕’이라는 말까지 들을 만큼 신성한 힘을 쓸 수 있는(비록 많이 부족하지만) 자기가, 고작 사람한테 모습이 바뀔 리 없었다.
그러나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맹호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방금 들었던 자기 목소리를 생각하면, 맹호는 확인한다는 것 자체가 그저 무섭게만 느껴졌다. 원래 어른처럼 낮고 묵직한 자기 목소리에선 생각도 못 할 만큼, ‘높은’ 소리가 났던 것이다. 이건 호랑이로서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일단 사람인 건 틀림없는데도, 맹호는 자기가 호랑이가 아닌 고양이로 바뀐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맹호는, 어쩐지 ‘직접 두 눈으로’ 보지 않아도 자기 처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입고 있는 교복이 마치 넝마라도 걸친 듯 헐렁해진 덕분에, 맹호는 이제 자기 현실을 도무지 무시할 수 없었다. 당연히 원래 딱 맞는 교복이 갑자기 커졌을 리는 없었다. 자기가 줄어들었기에, 옷도 커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게다가, 맹호는 그런 건 아무 상관없어질 만큼 또렷한 위화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뭔가 맹호를 만드는 ‘뿌리’에 가까운 데가, 송두리째 바뀐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이걸 확인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차마 그걸 길바닥에서 확인할 수는 없었기에, 맹호는 속으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건’ 맹호의 눈으로도 분간할 수 있었다. 방금 전과 달리 헐렁해진 교복 너머에서도, ‘그것’은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그런 생각에 빠진 맹호한테, 누군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마치 처음부터 맹호를 찾아온 것처럼, 그 발걸음은 빠르게 이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발걸음이 다가올 때마다 속으로 가슴이 쿵쾅대는 걸 느끼며, 맹호는 천천히 그 쪽으로 고개를 돌았다. 가로등 불빛이, 그 사람을 환히 비추기 시작했다.
낯선 여자애가, 가로등 너머에 선 채 맹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