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은 오후.
어떤 남성이, 혼자서 학교 운동장에 선 채 쇠를 치고 있었다.
그 남성은 4월이라는 아직 추운 날씨인데도, 흰 티에 검정색 바지만을 입고 있었다. 학생들이 모두 집에 돌아가고 남은 자리 한가운데에 덩그라니 선 채, 남성은 쇠를 꽉 쥐었다.
쨍쨍쨍.
남성이 채를 쥔 채 쇠를 가볍게 두드리자, 이 도시 한복판에서 믿기지 않을 만큼 시원한 소리가 크게 울렸다. 아마 모든 이들이 잊어버렸을, 하지만 누구의 마음속에나 자리잡은 크고도 강한 소리였다.
이 소리에 자극받았는지, 남성은 좀 더 채를 꽉 쥔 채 쇠를 몇 번이고 두드렸다. 팔에 힘을 세게 준 것도 아닌데, 쇠는 마치 온힘을 다해 두드려진 것마냥 굵은 소리를 냈다.
쨍쨍쩅. 쨍쩅쩅. 째래래래래래래랭.
도시와 안 맞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소리가, 한동안 운동장을 떠돌았다. 남성은 이제 좀 만족했는지, 그 소리가 저멀리 사라진 뒤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조금 추레한 느낌이긴 하지만, ‘좋은 사람이다’란 느낌을 받을 수 있는 20대 후반쯤 된 남성이었다. 그 표정만 보면, 어쩐지 몸집과 달리 순한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단단하게 다져진 몸이, 그 ‘순한 느낌’만 믿고 있으면 큰코다칠 수 있단 걸 말해주고 있다.
쨍쨍. 쨍쨍쩅. 남성은 몇 번이고, 자기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치려는 듯 쇠를 연주했다. 보통 남성보다 아주 조금 더 긴 머리카락이, 거세게 부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나부꼈다.
남성은 몸을 구부려가며, 고개를 들었다 말았다하며, 그저 쇠를 연주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쇠를 치는 게 즐겁단 말인가. 보통 이라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 때, 남성의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남성은 쇠를 치는 게 워낙 즐거워서인지, 이걸 전혀 깨닫지 못한 걸로 보였다.
“…선생님!”
하지만, 그 목소리는 망설이지 않고 ‘남성’의 이름을 불렀다. 남성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죽 연주만 하자, 마침내 그 남성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더 커졌다.
“선생님, 박혁준 선생님!!”
이 외침에, 남성, 아니 혁준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그 사람, 중년 남성을 쳐다봤다. 지금껏 저 남성이 자길 부르러 왔단 것조차 느끼지 못했단 표정이었다.
“아, 왜, 왜 그러시죠?”
“왜가 아니라, 지금은 저녁 아닙니까. 아무리 풍물동아리 담당이라 하시더라도 이런 시간에 꽹과리를 치시면, 그…”
“아, 안 된단 말씀이시죠?”
그 말을 듣자, 혁준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틀림없는 20대 후반(어쩌면 30세) 청년인데도, 그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어린애같은 느낌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그냥 치고 싶어서요. 안 치면 되겠죠?”
“네, 그렇게 해주시고…오늘 무슨 일 없죠? 그럼 얼른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이제 학교도 닫을 시간이고.”
“아, 네. 안녕히 가세요. 교감 선생님.”
자기 말을 끝내고 돌아가는 교감의 뒷모습을 빤히 보며, 혁준은 그렇게 어설픈 인사를 마쳤다. 그리고 한참동안,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채 가만히 서있었다. 마치 뭔가를 아쉬워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마 교감선생님은 평생이 가도 알 수 없을 터였다.
혁준이 지금 이 순간을 아쉬워하는 게 어떤 뜻인지를.
“에휴.”
이제 날이 어두워져 돌아갈 수밖에 없어지자, 혁준은 한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혁준의 손에 들려있는 건 쇠 하나밖에 없었지만, 어쩐지 큰 짐이라도 짊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혁준은 교감선생님한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건 쇠를 치는 까닭뿐만이 아니었다. 자기한테 이 쇠가 어떤 뜻인지, 아니, 자기 처지가 어떤지조차 혁준은 ‘어른들’한테 말한 적이 없다시피한 것이다.
혁준은 다시금, ‘원래’ 자기 모습을 멍하니 떠올렸다. 이제는 의지만으로 기억하고 있는, 하지만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진짜 모습을.
-자기는 어른도 아니고, 애초에 한국인도 아니고, 갑자기 ‘운명변이’라는 체질 하나 때문에 5년 전 이렇게 되고 만 열여덟 살짜리 여자애인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 적어도 보통 이들이라면. 자기가 살던 곳은 사실 이 나라가 아니라, 여기보다 무척 추운 곳이라 말한들 믿을 사람은 없다. 자기가 어떻게든 이 나라 말을 하며 ‘운명변이’에 의존한 채 살아온 게 고작 5년이며, 사회에서는 진짜 나이보다 열 살은 더 많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하지만 그래도, 혁준은 이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자기는 혼자가 아니란 걸 누구보다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기처럼 ‘운명변이’에 가까울 만큼 큰 힘을 지닌 건 아니지만, 그래도 비슷한 힘을 지닌 친구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손에 들린 이 쇠가 있으니까.
…그치만 누가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혁준, 아니 ‘그런 이름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자기한테는 믿을 만한 친구가 있지 않은가. 이 이상 바랄 건 없었다.
어차피 아무도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자기처럼 특이한 체질을 지닌 사람이 이 근처에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이상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아주 안 되는 일도 아니지 않을까.
혁준이 지닌 ‘운명변이’라는 체질은, 그런 일을 일으킬 만큼 ‘아주 많이 강한’ 거였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혁준은 다시 하늘을 들어 머리 위에 있는 달을 빤히 쳐다봤다.
몇 번이고 자기를 도와준 달한테, 다시금 도와달라는 마음을 담아 속으로 가만히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