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모두가 잠들었을 깊은 밤. 대문 앞에 주저앉은 채 혼자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은 겨울이므로 물론 밖은 무척 추웠지만, 그래도 집에 있는 것보단 마음이 편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집안에 있는 것보다, 이렇게 밖에 있는 게 훨씬 마음이 놓였다.
물론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밖이 추운 건 틀림없었다. 게다가 오늘밤엔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굵은 빗줄기는 아니지만, 지금 비가 내린다는 건 알 수 있을 만큼 차가운 빗방울이 머리카락을 조금씩 적셨다. 숨을 쉴 때마다 김이 나오는 걸 가만히 보면서,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골목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밤중에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여자애 혼자(집앞 대문이긴 했지만) 밖에 나와있는 게 바람직하지 않단 건 잘 알지만,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우산을 쓸 것까진 없었지만, 어둠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빗방울이 똑똑히 느껴졌다. 이런 날에 비가 오는 것도 마치 하늘의 장난같았지만, 애초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추운 것만은 견디기 어려웠다. 이런 날에 안 추운 것도 이상한 이야기지만, 노란색 가로등 불빛만이 골목을 비추는 지금, 이 순간은 평소보다 훨씬 더 차갑게 느껴졌다.
사실 오늘은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바로 다음 날이었다. 게다가 지금 이 시간은 아직 새벽 한 시였다. 고작 몇시간 전만 해도 이 세상은 크리스마스였다.
물론 크리스마스에 뭔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눈이 오지도 않았고, 즐거운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항상 그렇듯, 올해 크리스마스도 무미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원래부터 아무 기대도 안 하긴 했지만.
그렇게 대문 앞에 주저앉은 채 혼자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 있자, 만날 하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이 세상에 있는 건 오직 자기 하나뿐이라고. 물론 실제로 그렇지 않단 건 잘 알고 있지만, 적어도 ‘나’한테 있어서는 그런 것과 마찬가지라고. 자기 편도, 자기를 이해해줄 사람도, 그 누구도 없는 세상. 그러니까 지금 ‘나’에겐 세상에 오직 자기 하나만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사라져버릴까.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그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괜찮아?”
그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자, 거기엔 낯선 사람이 고개를 숙인 채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은 나머지, 대답하는 것도 잊은 채 잠시동안 그 사람의 표정을 빤히 쳐다봤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처음보는 사람이란 건 틀림없었지만, 그러니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혼자 가만히 생각했다. 일단 아까 목소리를 듣고 알았지만, 남성인 건 틀림없었다. 이렇게 두 눈으로 모습을 보니, 아마 자기보다 좀 더 나이가 있는 것같았다. 자기가 올해 중학교 1학년이므로, 대략 대학생쯤 되는 듯했다. 20대 중반에 조금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순한 느낌이라서였다. 마치 자기 동갑내기를 보는 듯한, 무척 친근하기 이를 데없는 느낌이었다. 겉모습은 이렇게 다른데도. 추위를 잘 타기라도 하는지, 두꺼운 외투에 두꺼운 은빛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게 묘하게 눈에 띄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만.
그렇게 갑자기 나타난 그 남자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문득 남자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남자는 왜 그러지?란 표정으로 자기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가 되어서야 자기만 혼자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단 걸 깨닫자,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리게 되었다.
“아, 그, 그게, 그…”
“미, 미안. 혼자 가만히 있는 게 그, 누가 있어줬으면 하는 거 같아서…갑자기 말걸어서 깜짝 놀랐지? 그, 나는 정말로 그냥 걱정이…”
남자는 그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한 듯, 오히려 자기보다 더 심하게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한 모습이 방금 자기가 느낀 그 ‘동갑내기를 보는 듯한’ 느낌을 한층 더 돋웠다. 지금껏 자기를 생각해주는 사람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어쩐지 처음 만났을 터인 이 사람, 이라기보다 ‘아이’는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 느꼈는가는 말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지금 자기한테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아무튼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단 생각에, 얼른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아니! 난 그냥 놀라서…”
그러자, 남자는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이런 말과 함께, 자기를 보며 환히 웃었다.
“그랬구나. 다행이다.”
순간, 모든 게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틀림없이 눈앞에 있는 건 20대쯤 되는 남성인데, 지금 ‘나’의 눈에 이 사람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 아니, ‘동성’에 가까운 친근함조차 느껴질 정도였다.

그 때, 거짓말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말이 입에 담기는 걸 느끼며, 가만히 눈앞에 방금 펼쳐진 풍경을 바라봤다.
뚝뚝 떨어지듯 내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치 이 때를 노리기라도 한 듯, 어둠에 가려져 모습 하나 보이지 않던 빗방울이 갑자기 ‘눈’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전혀 짐작치도 못한 그 광경에,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기적과 같은 순간. 현실이라 여겨지지 않을 만큼 모든 게 갖춰진 우연이 이 자리에 있었다. 눈은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가벼운 바람에 휘날려 현실 속에 흩날렸다.
그걸 이제 눈치챘는지, 남자는 자기처럼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치 그 눈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우아. 눈이다. 오늘 26일인데. 신기하다. 그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신기한 건 그것뿐만이 아닌 거 같다는 말을 어떻게든 참고 또 참으며.
12월 26일. 새벽 한 시.
비록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아니었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마음 속 깊은 곳에 다가오는 듯한 모습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껏 살면서 받은 가장 큰 크리스마스 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지금 생각하면 아득하기까지 한, ‘둘의 첫만남’이었다. 나와 그 아이의 첫만남. 알고지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지낸 듯한 느낌.
그리고 ‘모든 것의 시작’이기도 했다.
‘내’가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는 계기. 그리고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친구들’과 만나게 된 계기가 된 날이었으니까.